여름 내내 분홍빛 꽃이 지지도 않고 피어 있는 나무를 보면서 "저게 대체 뭐지?" 싶었던 적, 한 번쯤 있지 않으신가요. 저도 처음엔 그냥 예쁜 나무 정도로만 넘겼는데, 알고 보니 이름 하나에도 복잡한 역사와 오해가 켜켜이 쌓인 나무였습니다. 배롱나무, 흔히 목백일홍(木百日紅)이라 불리는 이 나무의 이름과 생태를 들여다보면 생각보다 훨씬 깊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백일홍이라는 이름, 사실 배롱나무 것이었습니다
배롱나무의 정식 학명은 Lagerstroemia indica이고, 중국 남부와 동남아시아가 원산지인 낙엽교목입니다. 낙엽교목이란 가을에 잎이 떨어지는 키 큰 나무를 말합니다. 높이 5m까지 자라고, 7월부터 9월 사이 약 100일에 걸쳐 꽃을 피웁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백일홍'하면 채송화나 봉숭아 옆에 심는 멕시코산 화초, Zinnia elegans를 떠올리시는데요, 그건 사실 배롱나무의 자리를 빼앗은 이름입니다. 동아시아 삼국은 오래전부터 Lagerstroemia indica를 '백일홍'이라 불러왔고, 배롱나무라는 이름 자체도 '백일홍'을 빠르게 발음하다 굳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름 혼용이 이렇게 고착된 데는 구조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개항기를 거쳐 일본을 통해 Zinnia elegans가 국내에 들어왔는데, 종묘상 입장에서는 이미 '꽃 중의 꽃'으로 유명하던 '백일홍'이라는 브랜드를 붙이는 편이 판매에 훨씬 유리했던 겁니다. 그 뒤 국민학교 자연 교과서나 식물 도감이 이 잘못된 명칭을 그대로 실으면서 식자층 사이에서까지 굳어졌습니다. 제가 직접 오래된 식물도감을 몇 권 비교해봤는데, 실제로 1970~80년대 도감에는 멕시코산 화초가 당연하다는 듯 '백일홍'으로 표기되어 있었습니다. 배롱나무는 한켠에 '목백일홍'이라는 보조 이름으로 겨우 실려 있고요.
이 혼란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일본식 구분법을 따르자는 의견도 있습니다. 즉, Lagerstroemia indica는 '백일홍', Zinnia elegans는 '백일초'로 나누는 방식입니다. 유통업계에서는 이미 배롱나무를 '목백일홍'이라 부르며 구분하는 관행이 자리잡고 있기도 합니다.
배롱나무가 유명한 곳을 미리 파악해두면 방문 계획을 세우기 훨씬 수월합니다.
- 담양 명옥헌: 연못 주변을 감싸는 배롱나무군이 절정
- 안동 병산서원: 서원 담장 곁에 늘어선 배롱나무가 고즈넉한 분위기
- 논산 명재고택: 고택과 어우러진 분홍빛 수관이 인상적
- 대구 하목정: 수령이 오래된 나무들이 집중되어 있음
- 대전 남간정사: 정사(精舍) 분위기와 배롱나무의 조합이 독특
서울에서 배롱나무를 보고 싶다면 덕수궁을 찾으면 됩니다. 배롱나무는 추위에 약한 수종(樹種)이라 충청남도 이남에서 주로 자라는데, 덕수궁의 배롱나무는 서울에서 보기 드문 사례입니다.
줄기가 간지럼을 탄다는 게 진짜일까, 수피의 비밀
배롱나무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특징이 바로 수피(樹皮)입니다. 수피란 나무의 겉껍질을 말하는데, 배롱나무의 수피는 얇게 조각조각 벗겨지면서 그 속의 새 껍질이 드러나 반들반들하고 밝은 얼룩무늬를 만들어냅니다. 처음 봤을 때 저는 솔직히 병든 나무인 줄 알았습니다. 줄기가 너무 매끈하고 군데군데 흰 얼룩이 있어서 뭔가 벗겨진 것처럼 보였거든요. 알고 보니 그게 이 나무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였습니다.
이 수피 때문에 붙은 별명이 여럿입니다. 일본에서는 원숭이도 미끄러진다고 하여 사루스베리(猿滑, サルスベリ)라고 부릅니다. 중국에서는 파양수(怕痒樹)라고 하는데, 《군방보(群芳譜)》라는 식물서에 "매끄러운 줄기를 긁어주면 모든 나무 가지가 흔들린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간지럼나무', '간질밥나무'라는 별명이 있고, 줄기를 쓰다듬으면 나무가 미세하게 흔들린다는 속설도 전해집니다. 제가 직접 병산서원 배롱나무 줄기를 손으로 문질러봤는데, 실제로 잔가지들이 살짝 떨리는 게 느껴졌습니다. 나무가 반응한다는 느낌이랄까요. 물론 이건 줄기가 가늘고 탄성이 있어서 생기는 현상이지만, 경험해보면 꽤 신기합니다.
중국에서는 배롱나무를 자미(紫薇)라고도 부릅니다. 자미는 북극성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당나라 황제가 거처하는 장안의 궁궐인 자미궁(紫薇宮)에 이 나무가 많이 심어졌던 데서 유래했습니다. 황제의 궁궐 나무였다는 배경을 알고 나면 꽃말이 '부귀'인 것도 자연스럽게 이해가 됩니다.
생육 환경 측면에서 보면, 배롱나무는 낙엽수치고는 까다롭지 않은 편입니다. 토질을 별로 가리지 않지만, 삽목(揷木)으로 번식할 때는 전년도에 자란 가지를 약 15cm 길이로 잘라 심는 방식을 씁니다. 삽목이란 식물의 줄기나 가지 일부를 잘라 흙에 꽂아 새 뿌리를 내리게 하는 번식 방법으로, 종자 파종보다 유전적으로 동일한 개체를 얻기 수월하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실제 묘목 시장에서는 삽목 2년생이 1,500원 선에 거래되고, 지름 8~10cm 규격으로 키운 나무는 농장 상태에서 5~8만원대에 거래됩니다.
지름 15cm짜리 대형목은 25만 원 수준입니다.
산림청 통계에 따르면 2005년 기준 배롱나무 생산량은 약 135만 그루에 달했습니다(출처: 산림청). 도심 조경과 가로수 수요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는 방증입니다. 국가생물다양성 정보공유체계(KBIF)에서도 Lagerstroemia indica의 분포 현황과 생태 정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출처: 국가생물다양성정보공유체계).
참고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배롱나무는 부산 양정동에 있으며, 배롱나무로는 유일하게 천연기념물 제168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수백 년을 살아남은 나무인 만큼 보호 가치를 인정받은 셈입니다.
여름 가로수를 그냥 지나쳤던 시절이 조금 아깝게 느껴집니다. 이름 하나가 이렇게 복잡한 역사를 품고 있는 나무는 흔치 않습니다. 올여름 서원이나 고택 방문 계획이 있다면, 배롱나무 개화 절정기인 7월 말에서 8월 중순 사이를 노려보시길 권합니다. 줄기를 직접 손으로 쓸어보는 것도 잊지 마시고요. 매끄러운 수피가 주는 감촉은 사진으로는 절대 전달되지 않습니다.
참고: https://namu.wiki/w/%EB%B0%B0%EB%A1%B1%EB%82%98%EB%AC%B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