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저는 한동안 공구리나 빠루 같은 말들이 왜 아직도 현장에서 쓰이는지 별로 의문을 품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 바닥 사람들이 쓰는 말이려니 했죠. 그런데 어느 날 인쇄 골목 어귀에서 도무송이니 도베라니 하는 말들을 생전 처음 듣고 멍해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제야 이게 단순한 은어가 아니라 꽤 깊은 역사와 맥락을 가진 언어 현상이라는 걸 실감했습니다.
일본어 잔재가 뿌리내린 이유: 팩트부터 짚어보면
공사판 현장 용어 중 상당수는 다이쇼(大正) 시대에서 쇼와(昭和) 시대에 걸쳐 일본 건설 현장에서 통용되던 말들이 뿌리입니다. 다이쇼·쇼와 시대란 대략 1912년부터 1989년에 이르는 일본 근대 산업화 시기를 가리키는데, 이 시기 한반도는 일제강점기와 겹칩니다. 그러니 현장 기술과 용어가 고스란히 이식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흐름이었습니다.
흥미로운 건 이 용어들이 그냥 일본어를 그대로 쓴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랜 세월을 거치며 발음이 변형되고, 의미까지 살짝 달라진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재플리시(Japlish)란 일본식으로 변형된 영어 외래어를 뜻하는데, 이것이 한국 현장에 들어오면서 한 번 더 변형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결과적으로 현대 일본어 원어민이 들어도 못 알아듣는 말이 수두룩하게 생겼습니다. 제가 보기엔 이건 그냥 일본어 잔재라기보다 한국 현장 노동자들이 수십 년에 걸쳐 만들어낸 독자적인 업계 은어에 가깝습니다.
도제식(徒弟式) 전수 구조도 이 언어가 살아남은 핵심 이유입니다. 도제식이란 한 명의 장인이나 숙련공 밑에서 기술을 몸으로 배우는 전통 방식으로, 학교 교육이 아니라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해지는 방식입니다. 이 구조에서는 선배가 쓰는 말을 후배가 그냥 받아 씁니다. 틀렸는지 따질 겨를이 없습니다. 현장 용어가 수십 년을 버텨온 건 사실 이 도제식 전수 구조 덕분이라는 의견에 저는 꽤 동의합니다.
현장 용어로 쓰이는 일본어 잔재의 주요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일본어 원형에서 발음이 변형되어 현대 일본어와 다름
- 영어를 일본식으로 축약한 재플리시가 다시 한국식으로 변형된 경우 포함
- 한자 전문용어에서 유래한 것이 많아 일반 일본어 학습자도 낯설게 느낌
- 도제식 구조로 인해 구어(口語) 형태로만 전승되어 표기가 불통일
국립국어원은 건설 현장 용어를 포함한 일본어 잔재 어휘 정비 작업을 꾸준히 진행해 왔습니다(출처: 국립국어원). 단순히 "일본말 쓰지 말자"는 감정적 접근이 아니라 실제로 현장에서 쓸 수 있는 대체어를 개발하고 보급하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언어는 스스로 바뀐다: 제가 목격한 변화
공구리가 콘크리트로 바뀌고, 도무송 대신 톰슨 가공이나 프레스 가공이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하는 걸 보면서 저는 한 가지를 느꼈습니다. 이 변화를 주도한 건 언어 순화 운동보다 세대 교체였다는 것입니다. 언어 순화 운동(語言純化運動)이란 외래어나 비표준 표현을 걸러내고 고유어나 표준 표현으로 바꾸려는 사회적 노력을 뜻하는데, 물론 이런 노력이 아예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더 큰 힘을 발휘한 건 그 말을 쓰던 세대가 현장을 떠나는 시간의 흐름이었습니다.
봉제 업계에서 일하는 젊은 분들이 나나인치나 큐큐라는 말 대신 새로운 표현을 찾고 있다는 이야기를 접한 적이 있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누가 시켜서 되는 변화가 아닙니다. 그 말의 출처를 아는 사람이 줄어들면, 말은 자연스럽게 교체됩니다. 현장에서 소통이 더 잘 되는 쪽으로 언어는 흘러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볼 지점이 있습니다. 용어의 변화를 무조건 '일제 잔재 청산'의 프레임으로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그 시각이 조금 과하다고 느낍니다. 정명(正名)이란 공자가 강조한 개념으로, "이름을 바로 해야 일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바른 용어를 쓰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게 반드시 국적을 따지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필요는 없습니다. 현장 노동자들이 소통하기 편한 말, 의미가 명확한 말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실제로 자일렌, 크실렌, 키시렌처럼 같은 화학물질을 두고 정부 기관마다 다른 이름을 쓰는 혼란은 이 문제의 심각성을 잘 보여줍니다. 안전보건공단에서는 크실렌, 화학물질안전원에서는 자일렌으로 표기하고 있는데(출처: 안전보건공단 화학물질정보), 이렇게 되면 현장 안전 교육에서도 혼선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직접 관련 자료를 찾아보면서 이게 단순한 용어 문제가 아니라 실질적인 안전 문제와 연결된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변화의 방향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에 대해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결정은 결국 그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손에 맡겨야 합니다. 데파나 아루 같은 말이 100년을 버텼다면, 테이퍼나 래디우스 혹은 빗각이나 반지름이 그 자리를 채울 날도 멀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타이밍은 운동이나 캠페인이 아니라 현장의 실제 흐름이 결정한다는 것, 이게 제 경험상 가장 솔직한 판단입니다.
용어는 결국 소통의 도구입니다. 누가 쓰는지, 왜 쓰는지를 먼저 이해하고 나서 바꿔야 할 말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명 운동이 의미를 가지려면 현장 노동자들의 언어 현실을 먼저 들여다봐야 합니다. 노가다판에서 일하는 분들의 전문성을 인정한다면, 그들이 쓰는 말을 바꾸는 일도 그들의 동의와 참여 위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참고: https://namu.wiki/w/%ED%98%84%EC%9E%A5%20%EC%9A%A9%EC%96%B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