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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설계

설계 예산 2억이 4억 8천이 된 날 — 청암고 학교숲 설계 수정기 (2편)

by 나무러버 2026. 7. 10.

지난 1편에서는 순천 청암고등학교 중정 1,170㎡가 어떻게 학교숲 조성사업 대상지가 되었는지, 그리고 추진위원회 협의회에서 어떤 이야기들이 오갔는지를 다뤘습니다. 이번 편은 그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30년 가까이 이 일을 해오면서 겪은 것 중 손에 꼽을 만한 실수를 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모두의 바람을 다 담았던 첫 번째 설계

워크숍과 중간보고회를 거치며 학교 구성원들의 요구사항이 쏟아졌습니다. 하나하나 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 맨발걷기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
  • 좌우 경계선에 벤치가 있으면 좋겠다
  • 배수 상태가 매우 좋지 않으니 해결방안을 제시해달라
  • 중앙에 공연이나 수업을 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을 검토해달라
  • 여학생들은 여럿이 함께 다니니, 다수가 앉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 드림홀 경사지에 계단형 화단을 만들어 스탠드 역할을 하게 하자
  • 조명을 설치해 야간 경관을 연출하자
  • 학생들이 주체적으로 가꿀 수 있는 꽃밭을 만들자

저는 이 목소리들을 최대한 다 담고 싶었습니다. 거기에 설계자로서의 욕심도 얹었습니다. 그렇게 2023년 11월 3일, 첫 번째 최종보고안이 나왔습니다.

2023년 11월 최종보고안 마스터플랜
2023년 11월 최종보고안 마스터플랜

도면만 보면 정말 근사했습니다. 우측 구역에는 큰 원형광장을 세 곳 배치하고 회전그네를 넣었습니다. 배수 불량 지역에는 썬큰포트를 조성해서 비가 오면 물을 모으고, 마른 날에는 분반모임 공간으로 쓰도록 했습니다. 각 썬큰포트 중앙에는 달의 형상을 본뜬 호박등을 세워 야간조명으로 쓸 계획이었습니다. 차양로 옆에는 몬드리안 패턴으로 공간을 나눠 초화류와 자갈로 경관을 연출하고, 드림홀에는 산을 모티브로 한 반개방형 울타리와 도시를 상징하는 큐브 형태의 시설물까지 넣었습니다.

수정 전 전체 조감도 — 우측의 원형광장 3곳과 몬드리안 패턴이 보입니다
수정 전 전체 조감도 — 우측의 원형광장 3곳과 몬드리안 패턴이 보입니다

실시설계를 해보니, 예산이 2배가 나왔습니다

문제는 실시설계였습니다. 도면을 확정하고 물량을 산출해서 적산을 돌려보니 소요예산이 4억 8천만 원. 이 사업의 예산은 2억 2천만 원이었습니다. 두 배가 넘게 나온 겁니다.

견적서를 앞에 두고 한참을 앉아 있었습니다. 원인은 분명했습니다. 협의회에서 나온 요구사항을 거의 다 반영한 데다, 원형광장·썬큰포트·조형 시설물 같은 디자인 요소를 겹겹이 쌓았고, 포장재도 화강석판석 같은 고급 자재를 썼습니다. 기본계획 단계에서 개략 공사비를 짚고 넘어갔어야 했는데, 좋은 공간을 만들겠다는 마음이 앞서 가장 기본적인 확인을 뒤로 미뤘던 겁니다.

결국 설계를 대폭 수정하기로 했습니다. 첫 최종보고안이 결정된 뒤 실시설계와 수정 작업까지, 한 달 남짓한 기간 동안 도면을 다시 그렸습니다.

수정의 원칙 —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덜어낼 것인가

예산을 절반 이하로 줄여야 하는 상황에서 무작정 지우기 시작하면 설계가 누더기가 됩니다. 그래서 먼저 원칙부터 세웠습니다.

지킨 것

  • 주진입로를 중앙에 배치하는 동선의 큰 골격
  • 건물 주변의 여유 공간 확보
  • 기존 대형수(녹나무, 가시나무, 은목서, 동백나무)를 살려 녹음수로 활용하는 방향
  • 드림홀 경사면의 컨튜리 매너블럭 화계 (스탠드 기능)
  • 마사토 포장 맨발걷기 공간

가장 우선한 것 — 배수

예산을 줄이면서도 절대 손대지 않은 항목이 배수입니다. 이 중정은 강우 시 침수가 생길 정도로 배수 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예쁜 정원을 만들어도 비만 오면 물이 고이는 공간이라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건물 주변과 녹지대, 그리고 배수가 특히 불량한 중앙통로 구간에 집수정을 여러 곳 설치하는 계획은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현장에서 배운 원칙이 하나 있다면, 보이지 않는 기반공사에서 아낀 돈은 나중에 몇 배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덜어낸 것

  • 신규 수목 식재를 없애고, 기존 수목을 이식·재배치하여 활용
  • 동선을 간략화하고, 철거하려던 중앙통로는 기존대로 유지
  • 포장 재질을 한 단계씩 현실적으로 조정
  • 원형광장, 썬큰포트 등 조형 요소의 간소화

그 결과 2023년 12월 29일, 수정된 최종보고안이 나왔습니다. 두 마스터플랜을 비교해 보시면 선이 얼마나 단순해졌는지 한눈에 보입니다.

수정 전 마스터플랜 (2023.11.03)
▲ 수정 전 마스터플랜 (2023.11.03)
수정 후 마스터플랜 (2023.12.29)
▼ 수정 후 마스터플랜 (2023.12.29)
수정 후 전체 조감도
수정 후 전체 조감도

구역별로 무엇이 어떻게 바뀌었나

① 드림홀 구역 — 시설물을 덜어내고 나무로 채우다

드림홀 수정 전 — 산 모티브 울타리와 큐브 시설물
▲ 드림홀 수정 전 — 산 모티브 울타리와 큐브 시설물
드림홀 수정 후 — 시설물을 걷어내고 무궁화 생울타리로
▼ 드림홀 수정 후 — 시설물을 걷어내고 무궁화 생울타리로
수정 전 (2023.11)수정 후 (2023.12)
산을 모티브로 한 반개방형 울타리로 공간 분리울타리 삭제 → 부지 내 무궁화를 옹벽 위치로 이식하여 생울타리 조성
큐브(도시) 형태의 시설물로 모임·휴식공간 조성큐브 시설물 삭제
기존 퍼고라·소나무 유지, 마사토 맨발걷기, 매너블럭 화계그대로 유지

울타리와 큐브는 이 설계의 상징적인 디자인 요소였지만, 기능만 놓고 보면 생울타리와 기존 시설로도 충분히 대체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부지 안에 있던 무궁화를 옮겨 심어 울타리로 쓴 것은 비용은 줄이면서 있는 자원을 살린 선택이었습니다.

② 좌측 구역 — 포장재를 바꿔 단가를 잡다

좌측 구역 수정 전 — 화강석판석 포장
▲ 좌측 구역 수정 전 — 화강석판석 포장
좌측 구역 수정 후 — 인조화강석 블록 + 풍성해진 지피식재
▼ 좌측 구역 수정 후 — 인조화강석 블록 + 풍성해진 지피식재
수정 전 (2023.11)수정 후 (2023.12)
화강석판석 포장 (회색·흰색 명암대비)인조화강석 블록 포장 (회색톤 + 블랙·화이트 패턴)
건물 주변 해미석 포장쇄석 포장으로 변경
음지 산책로 주변 맥문동 + 상사화본관 쪽 빈카마이너·휴케라·왕아주가·맥문동+꽃무릇, 별관 쪽 수크령(칼리로즈 외 3종)으로 구체화
기존 대형수 활용, 집수정 설치그대로 유지 + 광장형 공간과 목재벤치 추가

천연 화강석판석과 인조화강석 블록은 겉보기 차이보다 단가 차이가 훨씬 큽니다. 넓은 면적에 깔리는 포장재는 단가를 조금만 낮춰도 전체 공사비에서 절감 효과가 상당합니다. 대신 지피류 식재계획을 훨씬 구체적이고 풍성하게 다듬어서, 재료비를 아낀 만큼 식물로 공간의 표정을 살리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③ 중앙통로 — 철거 계획을 접고, 기존을 살리다

중앙통로 수정 전 — 차양 철거 후 동선 통합 계획
▲ 중앙통로 수정 전 — 차양 철거 후 동선 통합 계획
중앙통로 수정 후 — 기존 통로 유지, 초화류와 텃밭으로
▼ 중앙통로 수정 후 — 기존 통로 유지, 초화류와 텃밭으로
수정 전 (2023.11)수정 후 (2023.12)
기존 차양시설을 철거하고 두 개의 동선을 하나로 통합기존 통로 유지 (철거·재시공 비용 절감)
학생 참여 꽃밭 (금계국·해바라기 파종)학생들이 주체적으로 가꾸는 텃밭으로 변경
기둥 사이 화분 배치초화류 위주 식재로 정리 (분홍달맞이, 애기범부채, 가일라르디아, 루드베키아, 에키네시아, 빈카마이너)
-배수 불량 구간에 집수정 3곳 설치

중앙통로는 본관과 별관 사이를 오가는, 학생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지나는 공간입니다. 원안에서는 차양시설을 철거하고 동선을 통합하는 큰 공사를 계획했지만, 철거비와 재시공비를 따져보니 기존 통로를 살리는 편이 합리적이었습니다. 대신 감성을 자극하는 초화류를 심고 학생 텃밭을 배치해서, 큰 돈 들이지 않고도 매일 지나는 길이 즐거워지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이 구간이 배수가 특히 불량했기 때문에 집수정 3곳을 반영했습니다.

④ 우측 구역 — 가장 크게 덜어낸 곳

우측 구역 수정 전 — 원형광장 3곳, 썬큰포트, 몬드리안 패턴
▲ 우측 구역 수정 전 — 원형광장 3곳, 썬큰포트, 몬드리안 패턴
우측 구역 수정 후 — 앉음벽과 플랜터 중심으로 간소화
▼ 우측 구역 수정 후 — 앉음벽과 플랜터 중심으로 간소화
수정 전 (2023.11)수정 후 (2023.12)
원형 패턴의 큰 원형광장 3곳 (녹음공간, 회전그네)중앙에 앉음벽과 식재플랜터 1곳으로 간소화, 기존 은목서 식재
썬큰포트 조성 (건기엔 분반모임 공간)삭제
썬큰포트 중앙 호박등 야간조명 (달의 형상)삭제
몬드리안 패턴 공간 분리 (초화류 + 자갈)삭제 → 관목·초화류 식재로 대체 (목수국, 황금사철, 영산홍, 조팝나무, 화살나무, 샤스타데이지 등)
-본관 주변 음지·습지에 강한 초화류 (노루오줌, 비비추, 옥잠화, 수국)

가장 아까웠던 구역입니다. 원형광장 세 곳과 썬큰포트, 호박등은 이 설계에서 제 욕심이 가장 많이 들어간 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보면 시설물 공사비가 가장 많이 몰린 구역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앉음벽과 플랜터 하나로 간소화하고, 건물과 딱 붙어 있어 철거 의견이 나왔던 기존 은목서를 이곳으로 옮겨 심어 녹음과 쉼터의 기능은 유지했습니다. 화려한 조형물 대신 음지와 습지에 강한 초화류를 골라 심는 것으로, 이 자리의 조건에 맞는 식재계획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한 달 남짓의 수정 작업이 남긴 것

11월 3일의 첫 최종보고안과 12월 29일의 수정안을 나란히 놓고 보면, 화려함은 분명 줄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다시 봐도 수정안이 더 좋은 설계라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있는 것을 살리는 설계가 됐습니다. 기존 대형수를 녹음수로, 부지 내 무궁화를 생울타리로, 철거 예정이던 은목서를 쉼터의 중심목으로 썼습니다. 새로 사서 심는 나무보다 그 자리에서 수십 년 자란 나무가 학교의 기억을 담고 있습니다.

둘째, 돈이 기능에 먼저 쓰이게 됐습니다. 조형물과 고급 포장재에 들어갈 예산이 집수정과 배수 개선, 그리고 훨씬 풍성해진 식재계획으로 옮겨갔습니다.

셋째, 관리할 수 있는 설계가 됐습니다. 학교는 준공 후에 전문 관리인력이 상주하는 곳이 아닙니다. 시설물이 많을수록 몇 년 뒤 애물단지가 될 확률이 높습니다.

그리고 저 자신에게 남긴 교훈은 하나입니다. 기본계획 단계에서 반드시 개략 공사비를 함께 검토할 것. 요구사항을 다 담는 것이 좋은 설계가 아니라, 주어진 예산 안에서 우선순위를 가려내는 것이 설계자의 진짜 역할이라는 걸, 30년 차에 다시 한번 배웠습니다.

수정안이 확정된 뒤 공사 입찰이 진행되었습니다. 저는 설계까지만 맡았고 시공에는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공사가 모두 끝난 뒤에야 현장을 다시 찾았는데, 다행히 도면과 큰 차이 없이 시공되어 있었습니다. 도면 위의 선들이 실제 공간이 되어 학생들이 그 위를 걸어 다니는 모습을 보는 것은, 몇 번을 겪어도 설계자에게 가장 뿌듯한 순간입니다.

다음 편에서는 시공이 완료된 현장 사진들을 보여드리면서, 청암고등학교 학교숲 이야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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