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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

학교 중정이 숲이 되기까지 — 순천 청암고등학교 학교숲 설계기

by 나무러버 2026. 5. 13.

 

2023년 봄, 전남 순천의 청암고등학교로부터 연락이 왔다.

건물과 건물 사이 중정 공간, 1,170㎡(약 350평). 나무들이 있었지만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 공간이었다. 과도한 마운딩, 무분별한 식재, 프로그램 없는 방치. 552명의 학생들이 매일 지나다니면서도 사실상 외면하던 그 땅에, 학교숲을 만들어달라는 의뢰였다.

단순한 조경 공사가 아니었다. 학생, 교직원, 학부모가 모두 참여하는 '도시형 학교숲·생태놀이터 조성사업'이었고, 나는 이 과정을 이끌어갈 촉진자로 선정됐다.


1차 발표 — 현장은 솔직했다 (2023.07.17)

7월, 추진위원회 2차 협의회. 현장 답사 결과를 공유했다.

대상지는 본관과 별관 사이 중정 두 곳으로 나뉘어 있었다. 건물 북쪽에 위치한 탓에 하절기 이후에는 일조량이 심각하게 부족했다. 3월, 6월, 10월 각각 오전 9시·정오·오후 3시 시뮬레이션 결과가 그걸 명확히 보여줬다.

세 명의 외부 컨설턴트가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전라남도 교육청 학생교육원의 임원택 원장은 "기조성된 수목 상태가 매우 좋지 않고 무질서하게 식재돼 있으며, 마운딩이 부적절해 공간 특성이 없다"고 진단했다. 광주·전남 생명의숲 이석손 공동대표는 "비워진 공간으로 시각적으로 시원하게 처리하되, 녹지 속에 각종 활동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가도록 조성하라"고 제안했다. 나주 이화학교 이현희 교장은 "숲속에 오솔길을 만들어 접근을 용이하게 하고, 큰 나무 아래엔 쉼터를 두라"고 했다.

방향이 잡혔다. 비우고, 열고, 연결하자.

대상지 현황


2차 발표 — 숲의 언어를 설계하다 (2023.09.08)

9월, 디자인 워크숍 1차. 분석을 마치고 처음으로 설계안을 내놓은 자리였다.

이 공간의 정체성은 분명했다. 순천만국가정원, 순천만습지와 가까운 입지. 학교숲은 그 에코벨트의 한 거점이 될 수 있었다. 숲속의 교실, 살아있는 하나의 교실.

 

공간은 다섯 개 언어로 나눴다.

주진입로 — 건물과 통일감 있는 화강석 판석 포장. 기존 세면대를 이전해 동선을 열었다.

 

산책로(완충공간) — 음지 구간에 맥문동과 꽃무릇을 기반으로 조성. 건물 벽면에는 해미석을 포설해 수분 배수와 미관을 동시에 해결했다.

 

단체 활용공간 — 넓은 잔디 공간. 런웨이, 숲속 교실, 소공연장으로 활용 가능한 열린 마당.

 

위요공간 — 외부와 일부 차단된, 안락하고 프라이빗한 공간. 목재 데크와 가벽으로 연출했다.

 

상징공간 — 교목인 은행나무, 교화인 철쭉을 심고 그 주변에 초화류를 배치해 청암고만의 정체성을 담았다.

수종 선정도 이 발표에서 함께 다뤘다. 기존 수목 중 가시나무, 녹나무, 금목서, 은목서, 동백나무는 재활용했다. 옥향 23주와 가이즈카향나무 일부는 제거했다. 새로 도입할 수종으로는 칠엽수, 산딸나무, 이팝나무, 배롱나무, 산수유, 꽃사과를 제안했다. 지피층에는 맥문동, 꽃무릇, 수호초, 수크령, 벌개미취 등 계절감 있는 초화류를 배치했다.

 


3차 발표 — 구체화된 공간들 (2023.10.17)

10월, 중간 보고. 설계가 훨씬 구체화된 단계였다.

가장 집중한 곳은 드림홀 옆 공간이었다. 경사지를 컨튜리 매너블럭으로 계단 형식의 화계(花階)로 조성해 스탠드처럼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앉아 모일 수 있는 반외부 공간이 필요했다.

중정 우측의 배수 문제 해결이 핵심 과제였다. 지하수위가 높아 집수정만으로는 부족했다. 썬큰포트(선큰 화단)를 도입해, 강우 시에는 배수 기능을 하고 건기 시에는 소모임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계획했다. 중앙에 호박등을 설치해 야간에는 달의 형상으로 조명 역할도 하도록 했다.


최종 발표 — 워크숍의 목소리를 담다 (2023.11.03)

11월, 최종 보고. 발표 자리였지만, 동시에 그 전까지 쌓인 의견들의 결산이었다.

 

학생들이 요청한 것: "맨발로 걸을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 → 드림홀 동선의 마감재를 마사토 포장으로 변경해 맨발걷기 공간을 조성했다.

 

교직원들이 요청한 것: "중앙통로 두 개를 하나로 합쳤으면 좋겠다." → 기존 차양 시설을 철거하고 두 동선을 통합했다. 동선이 교차하는 곳에는 넓은 광장을 배치했다.

 

또 다른 요청들: 야간 조명 설치, 학생들이 직접 가꾸는 꽃밭, 경계부 벤치, 안전을 위한 썬큰포트 난간. → 모두 최종안에 반영됐다.

중정 우측은 원(圓) 패턴으로 전체 공간을 구성했다. 큰 원형 광장 세 곳을 주동선으로 연결하고, 각각에 회전그네와 쉼터를 배치했다. 차양로 좌측에는 몬드리안 패턴으로 공간을 분할해 각각 초화류와 자갈로 경관을 연출했다.

드림홀 구역은 산을 모티브로 한 반개방 울타리로 외부와 분리하고, 큐브 형태의 시설물을 배치해 모임 공간을 만들었다.


설계가 끝나도 숲은 계속된다

6월부터 11월까지, 약 6개월의 설계 과정이었다. TF팀 구성, 학부모 설명회, 선진학교 방문, 컨설팅, 워크숍, 발표. 그 모든 과정에 학생과 교직원과 학부모가 함께했다.

조경 설계는 설계자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 공간을 매일 쓰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설계 안으로 들어와야, 비로소 살아있는 공간이 된다.

청암고 학생들이 맨발로 마사토를 밟고, 원형 광장에서 반 친구들과 앉아 이야기하고, 호박등 아래 저녁 하늘을 보는 그 장면들이, 이 설계의 완성이다.


설계·촉진: 본인 (파인조경) / 발주처: 순천청암고등학교 / 사업: 2023년 도시형 학교숲·생태놀이터 조성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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