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니 절개지에 밤꽃 같은 꽃이 보인다는 겁니다. 9월 말인데 밤꽃이라니. 저도 유심히 살펴봤습니다. 분명 밤꽃처럼 생긴 흰 꽃이삭이 절개지 곳곳에 피어 있었어요. 그런데 뭔가 이상했습니다. 밤꽃 특유의 그 진한 향기가 없었습니다. 구례는 밤으로 유명한 곳이라 어릴때부터 밤꽃 향기를 모를 리 없는데, 아무리 맡아봐도 그 향이 없어요. 그렇다면 저게 정말 밤꽃일까요.

밤꽃은 9월에 피지 않는다
밤꽃은 6월에서 7월 사이에 피는 꽃입니다. 길고 흰 꽃이삭이 달리고 특유의 강한 향기가 납니다. 그 향이 워낙 독특해서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극명하게 갈리는 꽃이기도 해요. 9월 말은 밤꽃이 피는 시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꽃이 지고 밤이 한창 익어가는 시절입니다. 시기도 맞지 않고 향기도 없었으니 밤꽃이 아닌 건 확실했습니다.
개오동나무 꽃은 아닐까
누군가는 개오동이라고도 했습니다. 오동나무 계열인데 외국에서 들어온 품종 같다고요. 개오동, 정확히는 꽃개오동은 북아메리카 원산의 외래종으로 1905년 선교사가 들여왔다고 알려져 있어요. 흰색 꽃이 송이송이 모여 피고 꿀이 많아 밀원식물로도 유명합니다. 그런데 꽃개오동의 개화 시기는 6~7월입니다. 9월 말이면 꽃은 이미 오래전에 졌고 가늘고 긴 꼬투리 열매만 달려있을 때예요. 개오동도 아니었습니다.

싸리나무 vs 붉나무 — 절개지의 두 주인공
절개지를 다니다 보면 유독 많이 보이는 식물이 두 가지 있습니다. 싸리나무와 붉나무입니다. 둘 다 척박한 절개지 환경에서 잘 살아남는 강인한 식물들이에요. 그런데 꽃 색깔과 모양이 전혀 달라요.
싸리나무는 7~9월에 꽃이 핍니다. 꽃 색깔이 홍자색, 즉 보랏빛이 도는 붉은색이에요. 작고 귀여운 나비 모양 꽃들이 총상꽃차례를 이루며 달립니다. 높이는 1~3m 정도로 자라는 관목이에요. 싸리나무꽃은 밤꽃처럼 생기지 않았고 색깔도 전혀 달라서 이번 경우와는 맞지 않았습니다.
반면 붉나무는 7월 말에서 9월 초 사이에 황백색 꽃이삭이 원추형으로 가지 끝에 달립니다. 멀리서 보면 밤꽃처럼 길고 흰 꽃이삭처럼 보여요. 높이는 7~8m까지 자라는 소교목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향기가 거의 없습니다. 시기도 맞고, 색깔도 맞고, 향기도 없는 것도 맞았습니다. 정체는 붉나무였습니다.
| 구분 | 싸리나무 | 붉나무 |
|---|---|---|
| 꽃 색깔 | 홍자색 (보라빛) | 황백색 (밤꽃처럼 보임) |
| 개화 시기 | 7~9월 | 7월 말~9월 초 |
| 꽃 모양 | 작은 나비꽃 | 길고 흰 꽃이삭 |
| 향기 | 거의 없음 | 거의 없음 |
| 높이 | 1~3m (관목) | 7~8m (소교목) |
| 자라는 곳 | 절개지·산기슭 | 절개지·산기슭 |
붉나무, 알고 보면 흥미로운 나무
붉나무의 한자 이름은 염부목(鹽膚木)입니다. 소금 껍질을 가진 나무라는 뜻이에요. 열매에 짠맛과 신맛이 나는데, 소금이 귀했던 시절 소금 대용으로 활용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두부를 만들 때 간수 대용으로도 썼어요. 또 붉나무 꽃에는 꿀이 많아 밀원식물로도 중요하며, 붉나무 꿀은 일반 꿀보다 두 배 비싸게 팔릴 정도로 귀하다고 합니다.
가을이 되면 잎이 붉게 물듭니다. 단풍나무 못지않게 빛깔이 곱고 오래 가는 단풍이에요. 그래서 붉나무라는 이름이 붙은 거예요. 지금 9월 말 절개지에서 황백색 꽃이삭을 피우고 있는 그 붉나무가, 한 달 뒤면 새빨간 단풍으로 절개지를 물들입니다.
그리고 조경 천이의 관점에서 보면 붉나무는 절개지에서 가장 먼저 자리를 잡는 천이 선구식물 중 하나입니다. 척박한 맨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토양을 만들어주는 역할을 해요. 밤꽃처럼 생긴 꽃을 피우며 절개지를 먼저 개척하고 있는 거예요.
9월 말 고속도로 절개지에서 밤꽃 같은 꽃을 보셨다면 그건 밤꽃이 아닙니다. 향기도 없고 시기도 맞지 않아요. 정체는 바로 붉나무입니다. 조경 일을 30년 가까이 하면서 얼마나 많은 절개지를 다녔는지 모르는데, 이번에 다시 한번 제대로 들여다보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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